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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사상

누구도 로스차일드 가문을 막을 수 없다

by jian mom 2023. 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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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Pierre-Marie Jazet, after Charles de Steuben Bataille de Waterloo, 18 juin 1815

나탄 로스차일드의 활약

1804년 영국 시민권을 취득한 나탄은 세계의 중심 런던에 N.M.로스차일드 부자은행(N.M. Rothschild & Sons)을 세웠다. 외국계 은행으로는 최초로 근대의 대형 국제 금융기관이 되었다. 이후 로스차일드 가문은 상품거래, 밀수에는 손을 떼고 1810년부터 오늘날까지 돈만 취급하게 되었다. 

 

나탄, 빌헬름 백작을 이용하여 돈을 벌다

나탄은 빌헬름 백작에게 영국 콘솔채(만기가 없어 원금은 상환하지 않고 이자만 지급하는 영구채)투자를 제안한다. 빌헬름은 1809년 2월부터 1810년 12월까지 콘솔채 구입자금으로 55만 파운드 스털링을 투자한다. 나탄은 이 투자에서 작게는 20배, 많게는 150배의 수익을 남겼다. 빌헬름 백작은 나탄에게 콘솔채를 평균 72파운드 스털링으로 구입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나탄은 그 가격에 콘솔채를 사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계좌에 투자해 단기 수익을 올리고 그 돈으로 백작의 콘솔채를 구매해 두 번째 수익을 올렸다. 콘솔체의 가격이 62파운드 스털링까지 떨어졌으니 나탄은 채권의 시세차익을 이용하여 돈을 벌 수 있었다. 빌헬름 백작은 런던에서 투자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속 시원히 알 수 없어 불만이 많았다. 1811년 빌헬름 백작은 더 이상 콘솔채 투자하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빌헬름 백작의 투자 중단은 더 이상 로스차일드 가문한테는 대수로운 일이 아니었다. 나탄은 이 투자를 통해 빌헬름 재산 일부를 로스차일드 가문의 것으로 만들었고, 런던에서 새로운 금융 세력으로 급부상했다. 

 

나폴레옹과의 전쟁이 끝나고 유럽에는 평화가, 로스차일드 가문에는 돈이 찾아왔다

프랑스와의 전쟁 기간 중 웰링턴 장군 군대는 1809년부터 자금 부족에 시달린다. 1813년 2월 웰리턴 장군의 재정적 어려움은 극에 달한다. 웰링턴 군대는 영국의 보급선과 멀리 떨어져 있어 영국 정부가 군자금을 전달하는 것은 몹시 어려운 일이었다. 군자금을 전달하는 방법은 2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배를 통해 금괴를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으로 보내 그곳에서 지역 경화와 교환하는 방법, 다른 하나는 웰링턴이 런던에서 어음을 팔아 지역 은행가들에게 빌리는 방법이었다. 웰링턴은 언제 어디서나 지급이 가능한 통화가 필요했다. 영국 정부가 80만 파운드의 금괴를 어떻게 웰링턴 부대에 전달할지 고민할 때 나탄이 나선다. 영국 정부의 금괴 운송을 책임지기로 한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다섯째 아들 제임스가 교란작전을 수행했다. 프랑스 재무대신이 조작된 증거들을 아무 의심 없이 믿게 만든 것이다. 영국으로부터의 금괴 유출은 경제적 약화의 신호이므로 프랑스 입장에서는 나쁜 것이 없다는 재무대신의 조언을 나폴레옹이 그대로 따랐다. 프랑스는 제임스에게 속아 영국의 금이 프랑스를 통과하도록 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성공적으로 군자금 전달 업무를 수행했을 뿐만 아니라 1814년 나탄은 웰링턴이 프랑스로 진군하기 위한 자금을 조성하는 업무를 공식적으로 맡게 되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자금 전달이 성공했을 때 받게 되는 커미션 및 국가별로 환율의 차이가 큰 것을 이용하여 돈을 벌 수 있었다.

 

이전부터 로스차일드 가문은 공식 채널이나 정규 우편보다 훨씬 빠른 개인 특사를 통해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로스차일드 메신저들은 주식시장과 상품 시장에서 가장 유용한 최신 뉴스를 제공했다. 국가 간 전쟁이라는 큰 사건은 주식시장과 상품시장에 큰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워털루 전투의 결과는 정말 중요한 뉴스였다. 

1815년 6월 20일 새벽 나탄은 나폴레옹이 패했다는 소식을 가장 빨리 전해 듣고 런던으로 향했다. 나탄은 증권거래소로 가서 매매를 시작했다. 영국이 승리했으니 가격이 상승할 콘솔채를 사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나탄은 콘솔채를 사지 않았다. 반대로 콘솔채를 팔기 시작했다. 가지고 있는 물량을 계속 던졌다. 그는 이미 증권시장에서 영향력이 컸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따라서 매도에 동참했고 콘솔채 가격은 계속 내려갔다. 증권거래소에서는 영국군이 패했다는 소문까지 돌기 시작하면서 콘솔채가 폭락했다. 그러자 나탄은 매매 포지션을 바꿔 콘솔채를 헐값에 사들이기 시작했다. 잠시 후 영국의 승전 소식에 증권거래소에 날아들었고 콘솔채의 가격은 급등했다. 

 

마이어 로스차일드가 떠나면서 남긴 유언

1812년 9월 19일 마이어 로스차일드는 눈을 감는다. 마이어의 유언에서 강조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 가족 사업에서 여자들은 제외했다. 아들들에게 자신의 모든 사업을 물려주며 딸과 사위, 그들이 후손은 어떤 경우에도 사업에 관여해서는 안 되며 이를 어길 경우 최소한의 법정 지분만을 상속받도록 했다.

 

- 형제간의 단합을 강조했다. 1827년 브로크하우스 출판사의 「백과사전」에 올리기 위해 쓰였던 글에서 강조된 내용이다.

  ' 다섯 형제가 항상 일치단결하여 공동 사업을 운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고인이 된 그들의 부친이 남긴 규칙이었다. 부친의 사망 후에는 어떤 제안이 어디에서 나오든 공동 토론의 주제다. 모든 사업은 중요성이 덜한 것이라도 합의된 계획에 따라 공동의 노력으로 수행되었으며, 그 결과에 대해서는 동일한 지분을 가진다.'

대단한 것은 마이어가 유언을 단합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마이어의 아들들이 위기의 순간에서도 잘 지켜졌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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