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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사상

토머스 로버트 맬서스의 경제 사상

by jian mom 2023. 3.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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맬서스는 1766년 영국의 소도시 루커리, 중산층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1784년 케임브리지대학의 지저스칼리지에 입학하여 수학과를 졸업했다. 1789년에는 성직을 얻어 영국 국교회의 목사가 되었는데 그 이유는 경제적 안정과 함께 사색과 연구에 전념할 여유를 얻기 위해서라고 한다. 1805년에는 동인도회사의 부설 대학에서 역사와 정치경제학 과목의 교수직을 받아 평생 재직했다. 
 

맬서스, 1798년 <인구론>를 발표하다


그 당시 사회문제의 가장 본질적 측면이었던 빈곤문제를 정면으로 다룸으로써 사회문제 전반과 진보에 대한 자신의 의사와 태도를 분명하게 드러냈다. 그는 극단적인 보수주의자로서 인간사회의 발전 가능성을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프랑스 대혁명의 성과에 대해서도 불신했다.
 
 맬서스 이론이 형성된 배경은 다음과 같다.

1) 당시 영국의 식량 공급에 대한 인구의 압력이다. 약 1790년까지 영국은 대체로 식량을 자급해 왔지만, 산업혁명이 진행되면서 급속한 인구 증가로 식량가격이 현저하게 상승해 있었다. 그 결과 식량을 수입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2) 저소득 계층이 눈에 띄게 증가했다. 공장제 생산이 가내수공업을 대체하면서 영국은 점점 빠르게 도시화되어 가고 있었으며 도시의 성장에 따라 저소득층의 빈곤이 심화되었다.
 
3) 맬서스와 그의 부친인 다니엘과 논쟁이 있었다. 아버지와의 의견 대립은 그가 1798년 인구와 관련된 첫 번째 에세이를 저술하는 동기가 되었다. 다니엘은 그 당시 유행하던 진보사상의 신봉자로서 영국과 프랑스의 이상주의자였던 고드윈과 콩도로세의 견해에 동조했다. 그들의 기본적인 견해는 한 개인의 성격은 물려받는 것이 아니라 살고 있는 환경에 의해 형성된다는 것이었다. 즉, 그 당시 빈곤과 실업의 근본 원인이 불평등한 사유재산제도에 있다고 보았다.
 
맬서스는 부친의 급진주의에 큰 불만을 가졌고 급진주의와는 다른 주장을 했다. 노동자들은 기회만 있으면 소비하고, 심지어 저축할 여유가 있어도 술이나 도박으로 탕진한다. 또한 노동자들은 인류를 위해 산아 제한을 하거나 성적인 절제를 하지 않기 때문에 소득이 많아지면 더 많은 아이를 낳을 것이다. 그래서 맬서스는 부나 소득의 재분배를 위한 어떠한 정책에도 반대했고 사회주의 사상이 주장하는 부나 소득의 재분배를 위한 개혁이나 혁명은 현실성 없는 주장이라고 비판했다. 노동자들의 빈곤은 사회, 정치제도의 결과가 아니며 따라서 이 제도를 바꾸더라도 그러한 사회악을 제거할 수 없다고 논박했다.

영국의-고전파-경제학자-인구론의-저자
맬서스(1766~1834) 초상화


맬서스의 인구론은 다음 두 가지 가정에 기초한다.


1) 식량은 인간의 생존을 위해 필수적이다.

2) 이성간의 성적 욕망은 필요하며 불변할 것이다.

 

<인구론>에서 인구와 식량 증가를 비교했는데 기본 명제는 "인구는 식량 공급보다 더 빨리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이다.
이 명제는 이미 스미스나 플랭클린을 비롯한 다른 사람도 언급한 내용이다. 하지만 그 당시나 이후  경제적 사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바로 맬서스가 제시한 인구 문제였다.
인구의 증식력과 토지의 생산능력을 비교했을 때 인구의 증식력이 훨씬 크기 때문에 적절히 통제하지 않는다면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데 반해 식량 공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한다는 것이다. 
식량생산을 증가시키는 데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빈곤을 억제하기 위해선는 인구를 억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인구 증가율을 식량 공급 증가율과 조화를 유지할 수 있도록 억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음은 맬서스의 인구 억제책이다.

  예방적 억제(출산율 낮춤) 적극적 억제(사망률 높임)
빈곤과 악덕 임신을 줄임, 매춘,낙태, 피임,영아 살해 가난, 유아사망, 기근, 질병, 전쟁
도덕적 제어 만혼, 독식  

그러나 멜서스의 인구 억제책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맬서스도 위 방법을 통해 인구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기보다는
인구문제 해결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것으로부터 발생하는 모든 빈곤과 악덕을 숙명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하층민들에게 설득하려 했다. 맬서스에 의하면 사회적 불평등과 하층민의 빈곤은 인구 법칙이라는 자연법칙의 필연적인 결과이므로 하층민의 고통은 그들 스스로의 책임이며 이를 개선하려는 어떤 노력도 자연의 질서를 거역하는 일이다. 맬서스의 이런 사상은 '구빈법'에 대한 태도에서도 잘 나타난다. 

영국에서는 법률로 저소득층의 경제적 상태를 개선하려는 시도가 1600년경부터 이루어졌는데 경제사학자들은 이를 '구빈법'이라 불렀다. 고전학파 학자들은 구빈법에 맞선 논거를 맬서스의 '인구론'에서 찾았다. 맬서스는 '구빈법'이 빈민층의 결혼과 임신을 증가시켜 그들의 사회경제적 처지를 더욱 악화시킬 것이라며 비판했다. 맬서스의 인구 명제와 임금 기금설은 고전학파 경제 이론과 경제 정책에 적용되었다.

맬서스와-유사한-인구억제책을-주장한-사람이-70년-전에-이미-있었다.-걸리버여행기의-저자로-유명한-조너선-스위프트이다.-그는-겸손한-제안-이라는-작품에서-인구억제를-위해-끔찍한-제안을-했다.
인구 억제책 관련 이미지


※ 임금 기금설 : 실질 임금의 증가가 인구 증가를 가져와 궁극적으로 임금은 이전 수준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사회 저소득 계층의 경제적 후생을 향상하려는 시도는 결국 인구 규모가 증가해 버림으로써 무산될 것이다. 인본주의자들이 저소득층의 수입 증대를 위한 사회적 조치를 요구한다고 할지라도 냉철한 경제적 사고를 통해 볼 때 이런 노력은 아무런 상과가 없게 된다.
 

맬서스의 과소 소비론

당대에 맬서스와 리카도는 치열한 격론을 벌였다. 그 시대 최대의 쟁점은 '곡물법'에 관한 것이었다. 곡물의 수입을 허가할 것인가 아닌가 가 핵심인데 값싼 외국산 곡물의 수입은 당연히 곡물을 소비하는 자본가와 노동자들에게는 유리하지만 지주에게는 불리하다. 신흥 산업자본가 계급의 대변가로 불렸던 리카도는 당연히 곡물의 자유로운 수입을 주장했다. 리카도의 입장에서 '곡물법'의 폐지를 반대하는 것은 지주계급뿐이며 지주는 사회의 발전과 모든 구성원들의 행복을 가로막는 세력이었다.

 

그러나 맬서스는 리카도와는 반대로 지주야말로 사회와 경제의 발전을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계급이라고 주장했다. 맬서스는 <정치 경제학 원리>에서 생산적인 투자를 하지 않는 구시대의 유물과 같은 존재인 지주 계급이 새로운 시대에 해야 할 탁월한 역할을 언급했다.
 
이 이론에 따르면 자본주의 사회는 필연적으로 공급 과잉이 된다. 왜냐하면 생산능력이 증가할수록 소비도 그만큼 늘어나야 하는데 자본가는 축적하는 계급이어서 소비하지 않고 노동자는 소비하고자 하여도 빈곤하여 소비하지 못한다. 그래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상품이 창고에 가득 쌓여있어도 소비 부족과 공급 과잉으로 인해 불황이 만성적으로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

 
경제가 흡수할 수 있는 자본 축적의 적정 비율이 있으며 과도한 저축과 투자는 어려움을 야기할 것이라 주장했다. 저축은 소비재에 대한 수요를 축소시키고 투자는 미래에 더 많은 소비재를 생산한다는 점을 인식했다. 따라서 생산과 소비, 공급과 수요의 균형을 위해서는 생산하지 않고 소비만 하는 계급이 반드시 필요하다. 지주계급이 바로 그들이다. 


즉 아무리 값싼 외국산 곡물이 수입되어 곡물가격이 하락하더라도 노동자들은 여전히 빈곤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수요는 증가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주들의 수입이 감소함에 따라 사회 전체의 수요는 줄어들 것이다. 시장에 나온 상품들은 팔리지 않게 되고 결국은 치명적인 파국만이 기다릴 뿐이라고 주장했다. 생산하지 않고 사치와 소비만 일삼던 지주들이 이제는 경제를 불황과 스태그네이션에서 건져내는 구세주와 같은 존재가 된 것이다. 맬서스는 '곡물법' 논쟁에서 지주계급의 이익을 옹호했다.
 
그 당시 사유재산의 폐지와 무정부주의를 주장하는 급진주의 사상은 많은 사람들을 열광시켰다. 하지만 맬서스는 비관론자였다. 산업혁명의 진전과 함께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매우 빠르게 발전했지만 한편 대다수의 노동자계급은 여전히 극도로 빈곤했고 물질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비참한 상태였다. 맬서스의 사상은 자본주의가 가져오게 될 세상에 대한 불안감에서 비롯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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