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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사상

로스차일드 새로운 둥지를 마련하다

by jian mom 2023. 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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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헬름 9세가 새로운 궁전으로 옮겨간 같은 해 마이어와 그의 가족들도 게토 안에 있는 조금 더 넓은 집, 녹색 방패 간판이 달린 집으로 이사를 했다. 마이어는 이곳에서 추가로 포목점 운영을 시작했다. 새집에는 마이어의 비밀장소가 있었다. 

뒷마당 한편에 있는 작은 방이었다. 이곳에는 위장용 금고, 벽에는 비밀 선반이, 바닥에는 지하실로 통하는 문이 있었다. 마이어는 이곳에 문서, 계약서, 보증서 등을 보관했고 시간이 지나선 빌헬름 9세와 관련된 중요한 것들을 보관하게 된다. 

 

로스차일드 가문에는 '가족 경영'이라는 원칙이 있었다. 

마이어는 10명의 자식이 있었는데 이 중 5명의 아들들은 로스차일드 가문이 성공하는데 큰 밑거름이 되었다. 

첫째 암셸(미래 독일의 재무대신), 둘째 살로몬(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최고의 지위에 오름), 셋째 나탄(영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사람), 넷째 칼만(이탈리아반도를 손에 쥠), 다섯째 야코프(프랑스에서 대활약, 후에 제임스로 개명)이다. 

 

1789년 빌헬름 백작의 채권할인 업무를 맡게 된다. 800파운드짜리 채권이 마이어의 환전소로 왔다. 런던으로 지급되는 어음 수표를 할인해 현금화하는 것이다. 마이어의 아들들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대형 은행을 찾아가 자신들에게 빌헬름 백작과 은행의 중개업무를 맡겨달라고 부탁한다. 프랑크푸르트 은행들은 이들의 요구를 수락한다. 작은 수수료만 주면 까다롭고 유별난 빌헬름을 직접 응대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었다. 은행들과 빌헴름 모두 이들의 업무처리를 마음에 들어 했다. 빌헬름과 로스차일드가의 관계는 점점 단단해져 갔다. 마이어는 최고 궁전 어용상인으로 임명되었고, 암셀과 살로몬은 헤센 용병의 급여를 취급하는 대리인이 되었다. 로스차일드가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빌헬름 백작의 주거래 은행으로서 지위를 차지했다. 

 

1810년 9월 27일 마이어는 회사 이름을 '마이어 암셸 로스차일드 부자상회'로 변경한다고 공표했다. 셋째 나탄만 빠지고 회사는 마이어, 암셸, 살로몬, 야고프의 공동 소유가 되었다. 회사의 파트너십 계약에 따르면 나탄은 단 한 주의 주식도 보유하지 못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나탄은 로스차일드 가문의 사업에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로스차일드 가문, 의도하지 않은 나폴레옹의 도움을 받는다.  

1806년 10월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의 군대는 프로이센과 헤센으로 동시에 진격하고, 프랑크푸르트도 곧 점령군의 지휘 아래 들어가게 된다. 1806년 11월 1일 빌헬름 백작은 왕비의 친정이 있는 덴마크 왕국의 슐레스비히로 도망쳤다. 나폴레옹의 군대는 백작의 재산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마이어 로스차일드는 한 무더기의 문서를 자기 집 비밀 지하실 땅속에 묻고 있었다. 같은 시간 왕의 심복들은 성의 계단 밑에 보석들을 숨기고 있었다. 마이어의 집에 감춰둔 문서는 들키지 않았지만, 보석은 곧 발각되었다. 부데루스가 프랑스 점령군 총독, 라 그랑지 장군에게 100만 프랑의 뇌물을 건네 발각된 보석의 대부분이 도망가서 숨어있는 빌헬름 백작의 손에 들어갔다.

 

그러나 보석은 재산의 일부일 뿐 유럽 전역에 걸쳐 만기가 다가오는 많은 채권이 있었다. 그리고 배당금으로 한 달에 2,000파운드 가까이 들어오는 영국 투자처도 있었다. 부데루스는 빌헬름 백작의 엄청나고 복잡한 재산을 관리할 사람으로 마이어 로스차일드를 추천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재무대신이 빌헬름 백작의 국고를 법적으로 승계한다고 발표했다. 연이어 나폴레옹 군대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빌헬름 백작의 채권이 얼마인지 알아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아무런 성과도 없었다. 마이어의 아들들이 마차를 타고 유럽 전역을 돌며 채권들을 회수했다. 프랑스 경찰이 마이어 집에 들이닥쳤을 때도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로스차일드가는 부여된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1814년 나폴레옹이 실각한 후 빌헬름 백작은 마지막 한 푼까지 모두 받았다. 이후 여러 제후의 거액 차관도 로스차일드 가문이 관리하게 되었다. 

 

로스차일드 가문, 나폴레옹 전쟁 시기 밀수로 돈을 벌다.

1797년 셋째 아들 나탄은 면제품 직거래를 위해 맨체스터로 떠났다. 나탄은 프랑스 대혁명으로 값이 내려간 면포를 사서 게토의 상점으로 보내기 시작했다. 대혁명이 끝나자 면포 가격은 천정부지로 뛰어올랐다. 나탄은 여기서 번 수입을 주식과 채권 등에 투자한 후 다시 회전시켜 벌어들인 돈으로 환전 등의 금융업무에 관여했다. 로스차일드 가문 특유의 국경을 넘나드는 금융 네트워크가 싹트기 시작했다. 

 

처음 나탄은 면포만을 직거래하다 차츰 식료품, 영국 식민지에서 들여온 상품 등으로 취급 품목을 넓혀 나갔다. 1806년 나폴레옹이 대륙봉쇄령을 내렸을 때는 유럽 대륙에서 살 수 없는 모든 물품을 사들였다. 커피와 설탕, 담배, 면제품 등의 상품들이 영국에서는 판로가 막혀 가격이 폭락하고 그 외 국가에서는 공급이 부족해 가격이 폭등했다. 나탄이 사들인 물품들은 함부르크로 옮겨졌고 암셸과 살로몬은 이 물품들을 독일, 스칸디나비아, 프랑스 각지의 텅 빈 상점에 공급했다. 이러한 상품들은 아무리 비싸도 날개 돋친 듯이 팔려나가 로스차일드 가문은 엄청난 이익을 얻었다. 

 

프랑스 경찰이 아무리 수색해도 로스차일드 가문에서는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나폴레옹이 빌헬름 재산을 찾아내기 위해 로스차일드 집을 수색했을 때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대륙봉쇄령 시기 로스차일드 가문의 밀수가 의심되어 1810년 10월에 로스차일드 집을 이 잡듯이 뒤졌을 때도 어떠한 증거도 찾지 못했다.  1800년대 초 주요 교통수단은 역마차에 불과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맨체스터까지의 여행은 물로 정보교환은 어려운 일이었다. 프랑크푸르트 형제들 또는 로스차일드 가문의 신뢰를 받은 직원들이 편지를 주고받기 위해 먼 길을 왕복해야 했다. 마이어는 이러한 편지를 이디쉬어로 암호화시켜 작성했다. 이디쉬어는 독일어를 기초로 북유럽의 유대인들 사이에서 통용되던 언어이다. 유대인 이외는 내용을 전혀 파악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폴레옹 정부가 로스차일드 가문의 장부를 아무리 꼼꼼히 조사해도 알아낼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암호로 쓰인 서신, 현금, 밀수품 등은 로스차일드가 전용 마차의 이중 바닥에 실린 채 유럽 전역을 거침없이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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