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경제사상

로스차일드 가문 파헤치기 1 - 부의 서막

by jian mom 2023. 2. 25.
728x90

로스차일드와 J·P모건의 공통점은 세계 금융사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이다. 세계가 유럽을 축으로 돌아갈 때는 로스차일드가가, 세계가 미국을 축으로 돌아가기 시작할 때부터는 J·P모건이 금융계의 중심이 되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로스차일드가의 영향력은 살아있다. 

유대인에 대한 차별은 물론이고 혁명과 전쟁이 잦았던 시기에 어떻게 로스차일드가는 부를 이룰 수 있었을까? 더 대단한 점은 근대에 형성된 명문 가문 중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가문은 로스차일드가뿐이라는 것이다. 25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그 부와 명성을 지켜온 비결은 무엇인지 알아보려고 한다. 

 

로스차일드 왕국의 시조, 마이어 로스차일드 

로스차일드 가문의 창시자, 마이어 로스차일드

마이어의 조상은 유대인 게토(ghetto: 과거 유대인들이 모여 살도록 법으로 규정해 놓은 거주 지역)에서 오랫동안 작은 상점을 운영했다. 마이어는 훌륭한 랍비가 되기 위해 뉘른베르크 근처 예시바에 있는 랍비 양성학교에 다니게 된다. 그러나 부모님이 병으로 돌아가시게 되면서 3년 만에 학업을 중단하고, 하노버에 있는 유대인 금융업자 오펜하이머의 제자로 일을 배우게 된다. 7년 뒤 마이어는 하노버를 뒤로하고 다시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온다. 그 당시 독일은 공의 칭호를 받은 군주가 다스리는 작은 나라들이 모인 덩어리였고, 각 공국은 독자적인 법을 가지고 있었다. 프랑크푸르트는 특히 유대인에 대한 차별이 심했다. 마인강을 건널 때 유대인은 통행세를 내야 했고, 유대인의 농업·수공업 활동을 금지했고, 무기·실크·야채와 같이 귀한 물건은 매매할 수 없었다. 밤이 되면 군인들은 쇠사슬로 유대인 거리를 걸어 잠갔다. 유대인들 세대수가 많아지면 결혼도 제한했다. 이에 비하면 하노버는 유대인에 대해 관대한 지역이었다. 그런데 마이어는 무슨 생각으로 나름 편하게 살 수 있었던 하노버를 떠나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왔을까?

 

마이어는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와서 사촌 형인 모세와 칼만이 운영하는 고물 가게로 갔다. 마이어는 거기서 옛날 동전을 거래하기 시작했다. 평범한 기독교인들은 오래된 동전에 관심이 없어서 마이어는 다른 판로를 개척한다. 부유한 귀족들에게 동전을 팔기 시작한 것이다. 동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마이어가 직접 만든 상품 카탈로그를 가지고 부유한 귀족들과 거래하게 된 것이다. 동전을 팔기 위해 직접 만든 상품 카탈로그는 어떻게 제작되었을지 정말 궁금하다. 옛 동전에 어떤 가치를 부여했을까? 귀족들이 혹 할만한 스토리가 있었던 걸까? 

어느 날 마이어는 빌헬름 공과 대면하게 되고 진귀한 메달과 동전을 팔게 된다. 국가의 우두머리와 거래를 튼 것이다. 

 

마이어는 집에 환전소를 차렸다. 독일 내에서 통용되는 다양한 화폐를 교환하는 초보적인 형태의 은행이었다. 마이어는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리는 모든 박람회에 참석하여 각양각색의 진귀한 동전과 골동품들을 구입했다. 재정이 어려운 동전 수집상을 인수하기도 했다. 마이어는 특별하고 구하기 힘든 상품을 빌헬름 왕자에게 저렴하게 팔면서 환심을 샀다.

 

1769년 9월 21일 헤센 하나우 가문의 문장이 마이어 집 간판에 달리게 된다. 문장 밑에는 "M·A 로트칠트, 하나우성 빌헴름 전하의 어용상인으로 임명함."이라고 쓰여있다. 빌헴름이 마이어가 궁전과 거래를 한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해주는 것일 뿐 그 이상의 의미도 어떠한 특혜도 없었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마이어에게 좋은 일들이 생겼다. 주변에서 마이어를 대하는 인식이 달라졌고, 건물주는 건물의 일부를 마이어에게 팔았고, 구텔레와의 결혼도 허락받게 되고, 유대인이라 받던 차별도 없어지고, 여권 문제가 해결되면서 여행이 쉬워졌다.

 

마이어에게 어용상인이라는 직함을 준 빌헬름 공은 가진 영지는 작았지만 유럽의 여느 왕실 못지않은 고귀한 혈통을 이어받은 자였다. 그는 평화유지군 장사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군인에게 '대영제국 식민지의 평화를 지키는 헤센인'이라는 타이틀을 붙여서 영국에 팔았다. 헤센인 병사가 죽을 때마다 희생자의 사후 처리를 위한 추가보상금도 챙겼다. 그리고 대부업으로도 돈을 벌었는데 이자만 많이 준다면 신분 고하를 따지지 않았다. 그는 왕의 권력과 부르주아지의 돈이 합쳐진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통치자였다.

 

그리고 마이어와 빌헬름을 이어준 칼 부데루스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빌헬름의 재정 사무관으로 빌헬름 공의 금전욕을 만족시켜줬다. 빌헬름은 부데루스를 총애했다. 부데루스는 유대인을 좋아했고 마이어에게 관심을 보였다. 마이어가 가지고 오는 각종 진귀한 물건들을 좋아했다. 그는 마이어의 환전소를 통해 빌헬름 공의 런던 채권을 할인하기도 했다. 지속적이지는 않았지만 국가의 금융 업무에 발을 담그게 된 것이다. 마이어는 부데루스에게 능력을 인정받게 된다. 

 

1780년대 말까지 빌헬름과 마이어의 관계에 특별함은 없었다. 고작해야 장사꾼이 유대인이 왕족이나 귀족들과 가깝게 지내는 것이 평범한 것은 아니었다. 빌헬름의 아버지가 죽은 후 둘의 관계가 발전하게 된다. 빌헬름 공의 아버지는 유산으로 막대한 재산과 궁전 그리고 백작 작위까지 물려주었다. 궁전은 카셀에 위치한 빌헴름쇠헤 대궁전으로 옮겨지고 빌헬름은 빌헬름 9세가 되었다.  

 

to be continued...

 

 

 

728x9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