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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사상

영국에서 일어난 투기 열풍

by jian mom 2023. 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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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초의 버블은 네덜란드에 발생한 튤립버블이다. 이후 1687년 영국에서 두 번째 버블이 일어났다. 

 영국의 투기 열풍은 17세기부터 시작되었다

 윌리엄 핍스라는 선장이 에스파냐 보물선에서 각종 보물을 건져 올리면서부터이다. 무역으로 돈을 벌던 핍스는 바하마제도 근처에서 보물을 가득 실은 콘셉시온 호가 풍랑을 만나 침몰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7년 동안 바닷속을 뒤진 끝에 콘셉시온 호를 발견하고 거의 2달 동안 바닷속에서 고생하여 은괴 32톤, 금괴 11킬로그램과 각종 보물을 건져 올렸다. 핍스가 인양한 보물의 가격은 30만 파운드가 넘었다. 6월 초 런던에 입항한 핍스는 대대적인 환영과 함께 기사 작위까지 받았다. 제임스 2세와 선원 목을 뺀 나머지 돈은 후원자들에게 배당금 형식으로 되돌아갔다. 배당금은 사업 참여 순서와 후원금액에 따라 차등적으로 지급했는데 최고 배당률이 1만 퍼센트에 달했다.

핍스의 소식은 온 나라를 들뜨게 했다. 해저의 보물을 인양하려는 주식회사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1690년대 투자자들은 보물 인양회사 등과 같은 기업들에 광적인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1694년 잉글랜드 은행이 설립되면서 투기에 불을 지폈다. 잉글랜드 은행은 원래 윌리엄 3세의 전쟁 비용 마련을 위해 세워졌는데 잉글랜드 은행 주식이 우량주로 대중의 관심을 많이 받았다. 잉글랜드 은행 주식 공모는 청약 개시 2~3일 만에 마감될 정도로 크게 성공했다. 귀족, 농사꾼, 선원 등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청약에 뛰어들었다. 배정받은 잉글랜드 은행 주식에는 20%의 프리미엄이 붙었다. 잉글랜드 은행의 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그러나 프랑스와 전쟁을 치르느라 돈이 부족한데다 통화품질이 떨어지는 주화의 유통 및 사용을 금지하게 되면서 경제난이 일어났다. 주가가 내려가고 주식회사들이 줄도산했다. 대표적인 우량주였던 동인도회사의 주가도 1692년 200파운드에서 1697년 37파운드로 떨어졌다. 한때 140여 개에 달하던 주식회사들이 1697년에는 40개 정도만 남게 되었다. 이 공황은 투기와 연결되어 발생한 최초의 경제공황이다. 1697년 영국 의회는 투기를 제한하기 위해 브로커들과 주식거래업자들을 제한하는 법을 통과시켰으나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18세기 남해회사 버블이 터지다

18세기 들어서도 영국의 재정은 나빴다. 늘 돈에 쪼들렸던 왕실에 1711년 남해회사를 설립한 로버트 할리가 귀가 솔깃한 제안을 하게 된다. 로버는 할리는 영국 정부의 채권을 가져오는 투자자에게 자기 회사 주식을 내주겠다는 것이다. 이 제안으로 남해회사는 왕실로부터 남아메리카 지역의 무역에 대한 독점권을 획득하게 된다. 

 

그러나 남아메리카 대륙을 장악하고 있는 스페인이 남해회사를 그냥 둘 리가 없었다. 이익금의 25퍼센트는 에스파냐 국왕에게 귀속된다는 조건 아래 1년에 단 한 번 영국 무역선이 페루와 칠레, 멕시코로 오가며 교역할 수 있도록 계약하고 실제 교역도 1717년이 되어서야 가능했다. 그리고 다음 해에는 에스파냐가 영국 선박의 입항을 금지했다. 남해회사는 곧 200만 파운드라는 빚을 지게 된다.

 

이때 남해회사는 더 담찬 제안을 한다. 전환사채를 발행에 3100만 파운드의 국채를 전액 인수하겠다고 한 것이다. 1720년 4월 남해회사는 인수하는 국채를 자사주로 전환하여 판매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남해회사는 수상, 장관 등에게 주식의 스톡옵션을 뇌물로 주고 그 보답으로 새 주식의 발행 가격을 회사가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는 권리도 얻게 되었다. 즉 주식이 정부로부터 구입하는 국채의 가격보다 오르면 그것이 회사의 수익이 되는 것이다. 

 

※ 지금은 액면가 이상으로 주식을 발행할 경우 초과금은 '자본준비금' 항목에 귀속하여 주주들에게 배당할 수 없게 되어 있지만 18세기에는 주식발행 초과금은 회사의 수익으로 잡혔고 주주들에게도 배당할 수 있었다.

 

남해회사는 영국이 스페인의 식민지에서 노예무역을 독점할 수 있는 권한을 획득했다는 루머를 퍼뜨리며 주가를 끌어올렸다. 주식 추가 상장으로 주식 물량이 늘어났음에도 대중들 사이에서 남해회사 주식에 대한 관심은 점점 높아졌고 사람들의 기대심리를 자극하는 소문이 퍼지면서 남해회사 주가는 급등했다. 회사 설립 후 9년 동안 100파운드대에 머물던 주가가 1720년 8월 초 1000파운드를 찍게 된다.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발행된 한 신문은 1720년 7월 런던의 모습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했다고 한다.

'남해회사는 계속해서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있다. 잉글랜드 사람들은 수많은 벼락부자를 만들어낸 그 회사 주식만을 이야기했다. 주식 열풍으로 상거래는 침체하였고, 100척 이상의 배들이 템스강변에 정박한 채 팔려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본가들은 자신들의 일상적인 사업보다는 주식투기를 더 좋아했다' 

 

그러나 남해회사에 대한 소문은 사실이 아니며 경영 실태가 나쁘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주식은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버블을 야기했던 광기가 공황을 일으켰다. 같은 9월 주가는 150파운드로 급락했다. 수많은 투자자가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되었고 기업에 대한 신뢰가 붕괴하였다. 

 

의회는 진상조사를 하여 주가 조작을 한 관련자들과 뇌물을 받은 정치인을 처벌하였고 이러한 일이 재발하는 것을 막기 위해 거품 방지법을 입안했다. 이 법으로 7인 이상의 출자로 구성되는 주식회사를 설립할 때는 의회의 승인 또는 국왕의 허가가 필요하게 되었다. 18세기 영국 금융자본주의의 발전은 상당히 지체되었고 주식회사는 영국의 산업혁명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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