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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사상

영국에서 세계 최초의 민간 중앙은행이 탄생하다

by jian mom 2023. 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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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은행(BOE, Bank of England)의 탄생


네덜란드의 전성기가 끝나갈 무렵 네덜란드의 역동적인 에너지는 명예혁명이 일어난 영국으로 옮겨갔다. 네덜란드에서 윌리엄 왕을 따라 영국으로 건너간 인원이 1만 4000명의 군사를 포함해 3만여 명이었다. 민간인 가운데 반 이상이 유대인들이었다. 이후에도 윌리엄 3세의 종교적 관용 정책(비국교도에게 신앙의 자유를 인정함)으로 유대금융업자들이 대거 이동했다. 사람과 더불어 네덜란드식 사고방식과 금융제도까지 영국으로 흘러 들어갔다. 

 

17세기 후반 영국의 대외무역 팽창으로 상인과 해운업자들의 자금 수요가 많이 늘어나면서 새로운 금융기관에 대한 요구가 커졌다. 이전까지 영국의 상인들은 금장에 자산을 맡기고 금장에서 발행한 보관증으로 거래를 해왔다. 1694년 6월 21일 드디어 잉글랜드 은행이 의회 인가를 받고 정식 출범했다. 그러나 잉글랜드 은행의 가장 큰 설립 목적은 영국의 재정적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영국은 오랜 전쟁으로 국고가 바닥나고 있었다. 전쟁 비용이 모자라 1692년 국채를 발행했으나 이 방법도 영국의 재정적자를 해소할 수 없었다. 윌리엄 3세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는 당장 눈앞에 닥친 프랑스와의 전쟁을 위한 자금 마련이었다. 세금 징수권은 의회가 가져갔기 때문에 세금을 거두지 않고 전쟁 비용을 마련할 수 있는 방안이 필요했다. 윌리엄 3세는 유대 금융가들에게 120만 파운드를 빌려달라고 긴박하게 요청했다.

 

금융가들은 윌리엄 3세에게 돈을 모아 빌려주는 대가로 은행권을 발권할 수 있는 민간은행 설립 허가를 요구한다. 120만 파운드의 자본금을 모아 주식회사 은행을 세우고 이때 모은 자본금을 모두 국왕에게 대부하겠다는 것이었다.

왕은 120만 파운드를 연이자 8퍼센트로 빌리는 대신 이자만 지급하고 원금은 영구히 갚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유대 금융인들과 협상했다. 결국 군비 조달을 위해 자금은 빌리지만 이자만 갚는 대가로 금융가들에게 화폐주조권을 넘겼다.

하지만 잉글랜드 은행이 정부에 빌려준 돈은 실질적인 가치가 없는 증서 화폐이다. 처음 정부에 80만 파운드를 빌려주었을 때 이 금액의 일부는 은행권 형태로 정부에 지불되었는데 정부는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필요한 물품을 사는 데 이 은행권을 사용했다. 또한 이 은행권은 시장에서 돈처럼 유통되었다. 

 

이렇게 해서 영국에서 세계 최초의 민간 소유 중앙은행인 잉글랜드 은행이 설립되었다. 잉글랜드 은행은 주식공모를 통해 설립자금을 마련했다. 잉글랜드 은행은 국가에 거액의 대출을 해주고 이자 수익을 챙겼다. 잉글랜드 은행의 주주는 주식에 대한 배당금뿐만 아니라 주식 시장에서 주가가 오르면 그만큼 시세차익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강력한 금융 수단이 생기면서 돈을 빌리는 것이 쉬워지자 영국의 재정적자는 점점 늘어났다. 1689년 영국 정부가 가지고 있던 부채는 100만 파운드 정도였는데 1700년에는 1500만 파운드로 늘었다. 

 

<명예혁명>
1685년 제임스 2세가 왕위에 올랐으나 그는 가톨릭을 옹호하고 자의적인 전제정치를 실시했다. 이에 의회가 반발하여 1688년 12월 네덜란드 총독인 윌리엄의 군대를 끌어들이자 제임스 2세는 프랑스로 도망쳤고 의회는 윌리엄과 그의 부인 메리를 공동 왕으로 추대했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혁명이 이루어졌기 떄문에 이를 명예혁명이라고 부른다. 의회는 1689년 권리장전을 제정하여 영국의 입헌적 전통을 확인하고 입헌군주제를 설정했다.
권리장전에는 의회의 동의 없이 과세할 수 없다는 조항과 국민의 재산권을 확실하게 보장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있다. 
<국채>
국채란 국가가 채무의 담보로서 이를 발행하는 국가가 이자와 원금의 지급을 보증하는 채권이다. 전쟁 중 국채로 군사비가 조달되면 빚이 전쟁 비용으로 사용될 뿐만 아니라 국채라는 지급 증서가 세상에 돌아다니게 되니 두 배의 화폐가 사회에 투입되는 격이 된다. 국채가 가장 먼저 발행된 곳은 이탈리아였는데 유대인의 조언으로 영국에 이식되었다. 
국왕이 전쟁 등 긴급한 사태가 발생하면 금융업자나 상인에게 돈을 빌리고 제대로 갚지 않다 보니 왕의 보증은 신용도가 낮았다. 그런데 명예혁명으로 주권이 의회로 넘어가자 국왕의 빚이 국가의 채무로 바뀌었다. 국왕이 아니라 의회가 채무 반환을 보증함으로써 주권자인 국민이 납부하는 세금으로 확실하게 채무를 상환하는 구조가 된 것이다. 이로써 국채는 빚의 상환을 확약하는 증서로서 화폐처럼 취급받게 되었다.
<유대인의 비중>
영국이 짧은 시간 안에 금융 시스템을 구축하고 세계를 제패한 국가가 될 수 있었던 데는 유대인의 공이 크다. 
유대인은 윌리엄 3세가 왕위에 오른 뒤에 자신들의 방랑 역사상 어느 국가에서도 누리지 못한 경제적 지위는 물론 정치적 자유까지 얻게 된다. 영국에서 국교도와 비국교도의 차별이 없어진 이후 유대인들의 영향력은 점점 커졌다.
명예혁명 전후 영국에 들어온 대부분의 유대인은 1492년 알람브라 칙령으로 에스파냐에서 재산을 뺏기고 쫓겨났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포르투갈을 거쳐 네덜란드에서 경제적 번영을 누리다 영국으로 이주했다. 
대표적인 유대인으로는 데이비드 리카도, 라이오넬 로스차일드, 벤저민 디즈레일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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