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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사상

'달도 차면 기운다' 금융강국 네덜란드의 쇠퇴

by jian mom 2023. 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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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 산업 발전으로 17세기 동안 누렸던 네덜란드의 전성기도 계속되지는 못했다. 너무 일찍 성공을 맛본 부작용인지 투기로 인한 대규모 불황도 네덜란드가 가장 먼저 겪었다.

세계 최초의 버블이 네덜란드에서 일어났다.

투자와 투기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국어사전에 투자는 '이익을 얻기 위하여 어떤 일이나 사업에 자본을 대거나 시간이나 정성을 쏟음' , 투기는 '기회를 틈타 큰 이익을 보려고 함', '시세 변동을 예상하여 차익을 얻기 위하여 하는 매매 거래'라고 되어 있는데 이렇게만 봐서는 구별하는 것이 쉽지 않다. 2022년 노터스라는 주식이 6거래일 연속 상한가를 찍었다. 급등 이유는 주당 8주 무상증자였다. 하지만 이런 이유로 연속 상한가를 기록하는 것은 비상식적인 일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이 주식의 미래가치를 보고 매수했다면 투자이고 계속해서 상한가를 찍으니 일단 사보자는 생각에 매수했다면 투기라고 보면 될까? 투자를 한 것이라면 이 주식의 주당 가치를 계산하여 매도가를 정했을 텐데 갑자기 급등하여 목표가를 훨씬 초과했다. 이미 주가는 회사의 가치 이상으로 올랐고 이유 없이 급등하고 있어서 생각보다 많은 시세차익을 얻을 수 있는 상황이라 처음 계획대로 매도하지 않고 홀딩을 선택했다면 투자일까? 투기일까?

가격혁명으로 발생한 장기간의 인플레이션은 화폐의 가치를 떨어뜨렸고 그로 인해 투자는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신대륙에서 저렴한 은이 지속해서 대량 유입되면서 물가가 계속하여 상승하자 자산의 가치를 유지하기 위한 투자 필요성이 생긴 것이다. 네덜란드에서는 갈 곳을 잃은 돈이 특정한 대상에 대한 투기로 향했다. 그 대상은 바로 튤립이었다.
튤립은 궁정의 꽃으로 각별한 사랑을 받으며 1550년 이후 부자나 꽃을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퍼져나갔다.
네덜란드에서는 재배 기술 개발로 2000종류 이상의 다양한 모양과 색깔의 튤립을 재배할 수 있었다. 모양과 색깔이 다양해지자 특별한 튤립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졌다. 튤립 애호가들 사이에서 특이한 품종의 튤립 구근에는 상당히 높은 가격이 매겨졌다. 희귀 품종의 튤립 구근이 높은 가격에 거래가 되다 보니 튤립의 구근은 단순히 선호하는 대상에서 투기의 대상으로 바뀌었다.

1634년 ~1637년 튤립 구근의 가격이 비정상적으로 뛰면서 버블 상태가 되었다. 구근을 되팔기만 해도 안락하게 살 수 있고 부를 거머쥘 수 있었다. 돌연변이로 반점이 있는 브로큰 튤립의 가격은 그 당시 일반 가정의 1년 평균 생활비의 10배인 3,000 길더에 거래되었다.
튤립 재배업자들의 튤립 고급화 전략으로 튤립 구근의 표준 규격이 정해지고 거래 단위도 통일되면서 주식처럼 거래되었다. 튤립 거래가 일반화되자 투자하기는 더욱 쉬워졌다. 튤립 거래에서도 선물, 옵션 형태가 등장했다.
1637년 2월까지 급등하던 튤립 가격이 정점을 찍고는 갑자기 내려가기 시작했다. 가격이 내려가기 시작하자 손해에 대해 공포심리가 작용하여 많은 사람이 닥치는 대로 팔기 시작하여 구근이 가격이 폭락했다.
단기간에 수많은 사람이 파산했고 곳곳에서 분쟁이 일어났다. 결국 정부가 튤립 거래를 법률로 규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가격혁명>

스페인 식민지로부터 특히 금과 은이 유입됨에 따라 유럽의 금속화폐 공급이 16세기 동안 적어도 세 배는 증가했다. 스페인 정부는 금, 은의 수출을 금지하려고 시도하였으나 이는 불가능한 것으로 드러났다. 스페인 정부가 부채를 상환하기 위해 그리고 계속되는 전쟁의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이탈리아, 독일, 네덜란드에 막대한 양의 금, 은을 유출했다. 귀금속은 스페인뿐만 아니라 이 나라들로부터 밀반출되어 유럽 전역에 보급되었는데 이 결과로 엄청나고 장기간에 걸친 물가상승이 이어졌다.
16세기 말에는 물가가 초기에 비해 보통 3~4배나 높았다. 물가의 상승은 지역과 품목에 따라 매우 다양하였는데 곡물, 밀가루, 빵을 비롯한 식품의 가격이 대부분의 다른 상품의 가격보다 더 높았다.
일반적으로 화폐임금의 상승은 상품가격의 상승에 훨씬 못 미쳤으며 그에 따라 실질임금이 큰 폭으로 하락했다.
가격혁명이 모든 다른 인플레이션과 마찬가지로 개인과 사회집단의 소득과 부를 재분배했다.
소득이 가격 탄력적이었던 사람들인 상인, 제조업자, 자신의 토지를 경작하는 지주, 토지 보유 기간이 고정되어 있고 시장에 내다 팔기 위해 생산활동을 하는 소작농 등은 임금노동자, 소득이 고정되어 있거나 변하더라도 그 속도가 아주 느린 연금 수혜자, 수많은 지대 수입자, 비합리적으로 비싼 지대를 지불하는 소작농 등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익을 보았다.
네덜란드의 쇠퇴

네덜란드는 18세기 들어 완연한 쇠퇴기로 들어섰다. 풍요에 젖어 있어 건강하고 근면한 노동 정신이 엷어졌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사회지도층부터 나타났다. 1618년~1650년 사이 사회 지도층의 33%가 직업이 없고, 교외 별장 보유율은 10% 정도였다. 반면 1702년~1748년 사이에는 사회지도층의 73%가 직업이 없으며 교외 별장 보유율은 81%로 매우 증가했다. 사회지도층이 기업가나 금융업자에서 금리생활자로 변하고 토지를 보유하는 토지 귀족화되었다.
일하기 싫어하는 풍토는 점점 심해졌다.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일자리가 줄어들면서 인력들이 하나둘 네덜란드를 떠났다.
일할 사람이 없어지면서 제조업 기반은 붕괴하였고 경제는 활력을 잃어갔다.
18세기 이후 네덜란드는 지속적인 성장을 이루지 못했다. 특히 나폴레옹에게 점령당한 이후부터는 급속하게 국력이 쇠퇴했다. 결국 영국의 명예혁명 이후 많은 네덜란드 지식인들과 금융자본가들은 네덜란드를 떠나 영국으로 옮겨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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