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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사상

스페인은 굴러 들어온 복을 차 버렸다

by jian mom 2023. 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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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2년에 세계사에서 의미 있는 사건 3가지가 발생했다. 세 가지 사건은 다음과 같다.

첫째, 1492.1.2. 레콘키스타(기독교 세력의 국토회복운동)

둘째, 1492.3.31. 알람브라 칙령(유대인 추방령 선포)

셋째, 1492. 10.12. 콜럼버스 신대륙 발견

 

레콘키스타(Reconquista)

622년 아랍인들은 이슬람 왕국을 건설하고 8세기 이후 지금의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지역인 이베리아반도를 점령하였다. 11세기 들어 이슬람 세력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공격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3세기 말부터 기독교도들은 에스파냐 땅의 대부분을 되찾았으나 그라나다왕국은 마지막까지 남아 200년 이상 버텼다. 

 

기독교 세력의 승부수는 기독교 왕국 간의 정략결혼에 있었다. 그 당시 이베리아반도에는 3대 기독교 왕국이 있었다. 3개 왕국은 포루투갈, 카스티야, 아라곤이다. 카스티야의 이사벨 공주와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2세가 1469년 결혼하고 1479년 통일 카스티야 왕국을 세웠다. 통일 카스티야 왕국은 막강해진 군사력을 통해 이슬람의 마지막 거점인 그라나다를 1492년 1월 2일에 함락시켰다. 이 사건으로 스페인은 단번에 강대국으로 뛰어올랐다. 

 

알람브라 칙령(Alhambra Decree)

이사벨 공주와 페르난도 2세는 스페인 왕국을 통일하고 얼마 되지 않아 스페인에 있는 유대인 추방령을 선포했다. 

유대인 추방의 명분은 종교였지만 이슬람 세력을 물리치는 데 공을 세운 영주와 기사들에게 나눠줄 땅과 재화를 유대인에게 빼앗을 속셈이 있었다.

 

"우리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신 지 1492년째가 되는 해의 3월 31일, 우리의 도시 그라나다에서 이 교서를 반포하노라. 유대인들은 빈부와 귀천, 남녀노소, 거주지역, 현재 출생 여부를 불문하고 모두 떠나라."

"유대인의 모든 재산권을 인정하고 보호하며, 동산과 부동산을 자유롭게 처분해 국외로 반출할 권리를 부여한다."고 했다.

그러나 단서 조항으로 "금과 은, 화폐의 반출을 비롯해 국가가 정하는 품목은 금지한다." 고 명시했다.

 

유대인은 이 칙령이 반포된 후 4개월 이내 스페인을 떠나야 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유대인의 재산권을 인정한 것 같지만 집과 토지 등의 부동산을 이고 갈 수도 없고 그것들을 금, 은, 화폐로도 바꿀 수 없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재산을 가지고 갈 방법은 없었다.  

 

14~15세기 유대인의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곳은 스페인이었는데 이 알람브라 칙령으로 스페인에서는 17만명 정도의 유대인이 쫓겨났다.

콜럼버스 신대륙 발견

1492년 8월 3일 콜럼버스는 새로운 땅을 발견하려는 모험 정신, 기독교의 복음을 전도하겠다는 의지, 금을 향한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에스파냐의 팔로스항구에서 서쪽으로 출발하였다. 콜럼버스는 1506년 죽기 전까지 네 차례의 항해를 하였지만 금에 있어서는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다. 콜럼버스가 사망한 뒤 페르난도 2세가 조직한 탐험가들에 의해 많은 양의 금과 은이 스페인으로 유입되기 시작했다.

 

1492년 신대륙 발견은 세계사적 전환점이 되었다. 1492년 이전의 유럽은 부나 힘, 과학, 기술, 문화적 영향력에서 아시아를 능가하지 못했다. 오히려 상당히 뒤처져 있었다. 그러나 신대륙 발견 이후 유럽은 광대한 토지 확보, 수천만 명의 노동력, 풍부한 자원을 바탕으로 세계를 지배할 수 있게 되었다. 스페인은 금을 얻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스페인뿐만 아니라 다른 유럽 국가들의 금에 대한 욕망은 신대륙 발견과 식민지 확보 경쟁으로 이어졌다. 

 

유대인이 떠난 이후 스페인은?

 신흥강국 스페인의 귀족 사회는 풍요에 젖어있었다. 그라나다 왕국의 유산을 물려받고 유대인의 재산까지 사실상 강탈했기 때문이다. 알람브라 칙령으로 유대인들이 급하게 부동산을 처분해야 했기 때문에 고가의 저택과 농지를 싼 가격으로 사들일 수 있었다. 거기에 신대륙에서 들어오는 금과 은으로 스페인은 부가 넘쳐흘렀다. 그런데도 스페인의 전성기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유대인 추방으로 금융과 상업은 큰 타격을 받아 몰락하였다. 왜냐하면 상권을 장악하고 무역을 지원할 금융 산업을 일으킨 장본인이 유대인이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대규모 금융업을 꾸려 나가면서 왕실의 자금줄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신대륙에서 들어오는 금과 은만 믿고 계속하여 전쟁을 치르면서 나라의 재정은 악화하였고 높은 물가는 경제 상황을 더 나쁘게 했다. 신대륙에서 들어오는 금과 은으로 통화량은 늘고 전쟁을 치르는 군인들에게 봉급을 지급하다 보니 시중에 풀린 돈은 많은데 상품 생산은 정체되거나 감소하여 살 수 있는 물품이 부족하여 나머지는 수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스페인에서 유대인이 추방당할 때 주로 농업과 공예품 생산, 토목공사를 담당하던 이슬람교도들까지 같이 추방하면서 생산력은 이미 떨어지기 시작했다.

 

스페인 왕족들은 군사비 지출을 늘리거나 거대한 궁전을 지었고 귀족과 일반 국민들은 노동을 해서 돈을 벌기보다는 군인으로 출세하려고 하거나 많은 돈을 바라고 아메리카로 떠나면서 경제적 기반은 무너졌다.

 

스페인은 전쟁 비용 이외 넓은 국토를 유지하기 위해 재정에 필요한 돈이 엄청났다. 수입에 비해 지출이 훨씬 커 손실이 나는 국고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외국으로부터 돈을 빌려야 하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페인의 제국주의에 대한 야욕은 멈추지 않았다. 결국 여러 번의 파산 선고는 전쟁의 패배로 이어졌고 결국 스페인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열에서 빠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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