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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사상

미운털 박힌 유대인은 중세시대에 어떻게 돈을 벌었을까?

by jian mom 2023. 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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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유럽과 이슬람 제국

622년 아랍인들이 이슬람 왕국을 세웠다. 이슬람교가 등장한 지 1백년도 되기 전에 이슬람 왕국은 서양문명을 압도했다. 이슬람 왕국은 기독교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으나 유대인에게는 관대하였다.
이슬람 세력이 이베리아반도를 정복하면서 일부 유대인들도 이 지역으로 이주해 왔다. 이베리아반도는 상업의 발달로 눈부신 경제 발전을 이루었다.


8세기 이후 서부 지중해 위의 섬들은 모두 이슬람 세력의 수중에 들어가 지중해는 이슬람의 것이 되었다. 그리고 바이킹족이 북해를 지배했기 때문에 유럽 대륙은 해상 진출을 할 수 없어 장원경제 체제에만 의존하였다. 장원 경제에서는 농사 이외의 상업은 기독교 교리에서 탐욕의 직업으로 인식되었다.
이 시기 유럽에서 유대인은 농노들과 같은 영토에서 살 수는 있어도 공동체 구성원 자격은 부여받지 못하고 농사도 지을 수 없었다. 농사를 지을 수 없기 때문에 그 당시 천시받았던 장사나 물건을 만드는 수공업자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이베리아반도의 이슬람 왕국이 지중해 교역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당시 이슬람과 기독교 국가 간에는 전쟁 중이었다. 이때 유대인이 양쪽을 왕래하면서 무역을 독점하다시피 하였다. 

 

중세 유럽의 상업은 농촌과 주변 도시에서 이루어지는 국지적 상업과 지방과 지방 사이나 국제적 수준에서 행해지는 원격지 상업이 존재했다.
국지적 상업은 농촌은 도시에 식량과 공업 원료를 공급했고 도시는 농촌에 대해 농산물의 판매 시장 역할을 하면서 농촌 생활에 필요한 농기구 살림 도구 등 공산품을 공급했다.


11세기 이후 중세의 상업 발전을 주도한 것은 원격지 상업이었다. 이때는 국경선이나 보호무역주의 같은 장애물이 없는 유리한 조건 속에서 발전했다.
원격지 상업이 발달하면서 국제적 교역 중심지에는 1년에 1~2주 정도 개최되는 견본시가 형성되었다. 견본시에서는 대량의 상품이 거래되었고 금융업도 크게 발전했다.
물품의 대금 지급에는 현금 외에도 어음 등 신용화폐가 사용되었고 이탈리아인들을 중심으로 국제적 금융거래가 이루어졌는데 상권을 주도하는 민족은 유대인이었다.


원격지 상업의 중심 도시들은 그들의 상업 활동을 보호하고 상권을 확대하기 위하여 13세기부터 라인 동맹, 한자 동맹, 롬바르디아 동맹과 같은 경제적 ·정치적· 군사적 도시동맹을 결성했다.
상업의 발달에 따라 투자와 경영이 다양하게 결합한 여러 종류의 기업 형태가 생겨나고 대규모의 교역 회사가 설립되기 시작했으며 보험 제도와 우편제도도 시행되었다.


11세기 이후 상업과 도시가 발달하면서 상인과 수공업자들의 동업조합이라고 할 수 있는 길드가 많이 설립되었다. 길드는 조합원 사이의 평등을 바탕으로 경조사 등에서의 상호부조와 친목을 목표로 하여 생겨나 공제조합적 친목적 성격의 단체였다. 상업과 수공업에서 기독교도 위주의 길드가 조직되고부터는 유대인들에게 기독교도들이 꺼리고 사회적으로 냉대 받는 일거리(노예상, 가축상, 전당포, 고물상, 대부업)만이 유일한 생계 수단이 되었다.

12세기부터 환전상이 생겨났고 환전상은 차차 환전뿐만 아니라 예금 대출 저당 어음 할인 기능을 담당하는 은행으로 발전했다. 화폐 사용이 폭발적으로 늘어나자 13세기부터는 수표 환어음 신용장 등 신용거래 수단도 많이 사용되었다. 군주는 전쟁 수행과 권력 유지를 위해, 귀족은 사치 생활 영위를 위해, 농민은 지대 납부에 화폐가 필요하여 상업 활동을 통하여 재부를 축적한 상인들이 이들을 대상으로 하여 벌이는 고리대금업이 성행했다.


13세기가 끝나갈 무렵 유럽은 위기에 봉착했다. 1347~1351 사이 흑사병이 유행하면서 유럽 인구의 절반 가까이가 사망했다. 병의 원인과 감염 경로 그리고 치료 방법 등 어느 것도 알 수 없었다. 일반인들은 먹는 물에 유태인들이 독을 타서 생긴 것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교회나 교회 지도자들은 제대로 된 대처를 하기보다는 흑사병의 원인을 유대인이나 외부인에게 돌리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유대인이 돈을 벌 수 있었던 이유

○ 이슬람과 기독교의 대립으로 유대인은 동방무역을 거의 독점적으로 할 수 있었다.

   당시 기독교와 이슬람은 적대 관계에 있었다. 교황이 이슬람권과의 무역을 금지하였는데 이슬람권에 통행이 가능한 유대인은 양쪽을 오가며 무역 활동을 할 수 있었다. 

 

○ 유대인이 상업활동에 종사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의 교육열에 있다.

   유대인에게 교육은 가장 큰 덕목이다. 가톨릭에서는 신도들이 이단에 빠질 것을 두려워하여  <<성경>>을 읽는 것을 금지했지만 유대교는 유대인들에게  <<성경>>을 읽히기 위해 기원전부터 글을 가르쳤다. 중세 후반까지 유대인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문맹인이었지만 유대인은 글을 읽고 쓸 줄 알았다. 
상인들은 일주일에 적어도 서너 통의 편지를 써야 했고 이에 더해 자신의 상업 활동을 상세하게 장부에 기록해야 했는데 유대인은 이것이 가능했다. 

 

○ 유대인 공동체는 무역에 있어 가장 큰 힘이 되었다.

   원거리 무역을 하기 위해서는 회계, 외환, 외국어, 상품의 시세 등 많은 것을 알아야 한다. 유대인들은 세계 각국에 커뮤니티를 가지고 있어 이러한 정보와 외환시세 산정에 능숙하였다. 유대인 랍비들은 멀리 떨어져 있는 커뮤니티 간에 편지를 교환했다. 편지를 주고받으며 종교상의 의문점을 풀고, 크고 작은 전통과 대소사를 의논하였다. 이 외에 편지에 현지 사정과 변화들, 상품과 환시세의 변동도 기재되었다. 동일한 상품이라도 지역에 따라 가치가 다른 점을 이용해 돈을 벌고 금과 은의 교환 비율이 나라마다 다른 환차익을 이용해 돈을 벌었다. 

 

○ 유대인은 대부업을 할 수 있었다.

  기독교는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것을 죄악으로 간주했다. 1179년 교황청이 공식적으로 기독교인의 대부업을 금지하였다. 반면 유대교에서는 유대인이 아닌 사람에게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것은 인정하였기 때문에 유대인은 대부업을 할 수 있었다. 11세기 이후 상업혁명으로 금융업도 발전하기 시작했는데 유대인은 대부업을 통해 금융 산업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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